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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꿈

VOL.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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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품이 전하는
기억의 목소리

사진작가 고현주

유품이 주는 메시지는 말이 없어도 강하다. 들여다보면 기억이, 추억이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그 존재는 너무나 크다.
4·3의 기억을 부르는 오래된 물건을 찍은 사진작가 고현주 씨에게 유물이 전하는 말을 듣다.
글. 박라미 / 사진. 정익환

봉인된 70년의 기억을 열다

관 열고 처음 본 어머니의 은가락지, 젊은 시절 아버지의 초상화, 녹이 슨 숟가락, 아버지가 유년 시절 입었던 100년 된 저고리, 명주에 옥색 물들인 결혼 예복, 유언이 된 해방조선 기념엽서, 밤새 눈물로 바느질하셨을 미싱, 시아버지 제삿날과 산소 위치를 적어둔 궤 …. 고현주 작가가 앵글에 담은 4·3 희생자 유품은 70년 동안 봉인된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반추하게 한다. 이 사진들은 작년 11월 제주4·3평화재단에서 ‘기억의 목소리’ 전시와 함께 사진집으로 출간했다. 짙은 보랏빛 책 표지 또한 4·3과 연관 있는 감자 전분으로 만든 친환경 종이를 사용했다. “오래된 물건은 단순히 사물이 아닙니다. 그 시절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죠. 4·3 희생자 영령들이 남기고 간 낡고 볼품없는 물건들, 이 유품들은 4·3의 역사적 현장을 증언하는 물건들입니다. 저는 제주4·3으로 개인의 일상이 깨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이고 절망인지 사물을 통해 개인의 삶을 바라보았고, 이를 통해 참혹하고 비극적인 참상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선명한 아픔과 슬픔의 흔적

제주특별자치도와 사단법인 제주국제화센터가 함께 발행한 「기억의 목소리」는 고현주 작가가 사진을 찍고 시와 인터뷰 글은 시인 허은실 작가가 썼다. 이들은 2018년부터 2년 동안 20여 명의 4·3 유족을 만나 사연을 듣고 물건을 촬영했다. 전시장에는 사진과 시뿐만 아니라 실제 유품과 사연도 함께 소개했다. 물건에 얽힌 사연과 함께 사진과 시를 감상하면 유족의 아픔과 슬픔이 그대로 전해져 가슴이 먹먹해 온다.
“유족들이 견디어 낸 시간의 흔적을 찾는 여정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유품들은 현장에서 촬영하거나 스튜디오의 조명이 아닌 최대한 자연 속에서 자연광으로 촬영했습니다. 조명을 비추면 물건은 잘 나오겠지만 그들이 생활 속에서 함께한 아픔의 시간을 담아낼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소중한 사람들과 이들이 사용한 물건을 바라보면서 깊은 애도와 함께 4·3 유족들이 상처를 치유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한다.
  • 중산간 7-2, 중산간 3-1 (2014)

꿈꾸는 카메라,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소통

고현주 작가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 음악 교사로 일하다 30대 중반 늦게 사진을 시작했다. 라이카 카메라를 쓰던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사진에 관심이 있었던 그녀는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2002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2003년 타임스페이스·스포츠조선이 공동주최하는 ‘제5회 사진비평상’ 우수상을 수상했고, ‘재건축아파트’, ‘기관의 경관’, ‘중산간(重山艮)’ 등을 전시했다. 또 그녀는 5년 동안 안양소년원 아이들에게 사진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소외된 아이들이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과정은 ‘프레시안’에 연재, ‘꿈꾸는 카메라-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소통’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저는 사진을 예쁘고 멋있게 찍는 것이 아니라. 왜 찍는가, 무엇을 찍을 것인가. 사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대상을 오래 바라보고, 많이 생각하고, 때론 낯설게 보기도 하며 사진을 찍기 전 관련 자료나 책을 읽고 시간을 들여 고민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고현주 작가의 사진에서 인문학적 깊이가 남다르다는 것이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인가 보다.
사진집 「기억의 목소리」

제주의 자연이 준 위로, 중산간(重山艮)

제주에서 고현주라는 이름을 알린 것은 ‘중산간(重山艮)’ 전이다. 경외감이 들 만큼 신비롭고 압도적인 크기의 제주의 자연경관, 2미터, 3미터 크기의 웅장한 제주의 자연을 바라보는 한 여인, 자연의 위대함을 그녀는 인간을 한 점으로 표현했다. 작품 앞에 의자를 놓아 앉아서 관람하게 해 마치 사진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중산간(重山艮)은 주역의 52번째 괘로서,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는 형국으로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갈 수 없으니 ‘멈추라’라는 뜻이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제주의 자연은 검고 거대한 바다와 육중한 바위 계곡, 길이 끊어진 숲. 말 그대로 첩첩산중, 진퇴양난이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가 제주의 자연에서 느꼈던 순간을 기록한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자연의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공간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힘든 시기 찾은 고향 서귀포의 바다와 자연은 나를 압도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나를 온전히 품어주었습니다.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제주의 자연이 제게 주었던 위로와 치유의 순간을 중산간(重山艮)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재일 제주도민 유품 작업 준비 중

오래된 물건에 애착이 있는 고현주 작가. 외삼촌이 쓰던 라이카 카메라를 메고 어머니가 입던 코트를 입고 온 그녀. 추억이 담긴 물건, 정이 가는 것을 버리지 않고 귀히 여기는 성격이다. 늘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 그녀는 20년 된 수첩을 아직도 들춰보는데, ‘기억의 목소리’ 아이디어도 10년 전 메모를 보고 생각한 것이라고. 또한 그녀는 물건과 대화하기를 즐긴다. 차를 마시면서 컵과 대화하고, 꽃과 바람과 얘기를 나눈다. 사물에 대하는 애정이 남다른 그녀답다. 오랜 타향살이 끝에 17년 만에 찾은 제주. 이주 5년 차인 그녀는 제주의 자연을, 제주의 아픔을 앵글에 담고 싶은 마음이다.
“한 사물을 오래 깊이 바라봐야 생각의 싹이 틉니다. 물건은 세월이 지나면 이야기가 됩니다. 저도 이번 ‘기억의 목소리’ 작업을 통해 4·3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알았고, 많이 배웠습니다. 이것이 저의 작업의 또 다른 시작점으로, 사물 사진 작업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현재 일제강점기 이후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 제주도민의 유품 사진 촬영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서사 기록이 역사로, 역사가 문화가 되어야 시대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