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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꿈

VOL.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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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돌문화의 상징

돌하르방

국토최남단 절해고도(絶海孤島)로서 원초적 자연환경을 간직한 제주도는 오랫동안 거친 땅을 일구며 독특한 돌문화를 형성해왔다.
돌하르방과 복신미륵, 동자석과 분묘석물, 돌담과 돌탑, 정주석과 정낭, 돌방아, 돌절구 등 예술조각에서부터 여러 생활도구에 이르기까지
제주인의 삶 속에 두루 녹아 있다. 제주 돌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돌하르방의 역사와 문화재적 가치 재정립에 대해 살펴본다.
글, 사진. 황시권(미술사학박사)

돌하르방은 언제 세워졌을까

원래 돌하르방은 제주 3읍성의 3문 입구에 2쌍 4기를 기본으로 하여 제주읍성(濟州邑城) 24기, 정의현성(旌義縣城) 12기, 대정현성(大靜縣城) 12기 등 48기가 세워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성곽이 헐릴 때 제주읍성 남문 돌하르방 1기가 분실되어 현재 47기만 남아있다. 또한 1967년 9월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입구로 옮겨진 제주읍성 동문입구 2기 돌하르방은 문화재보호법상 ‘관할구역 밖’이라는 이유로 아직도 문화재로 지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로 인해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것은 45기뿐이다.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1971년 문화재로 지정할 때 붙여졌으며 당시 민속학자들의 현지조사에서는 ‘돌하르방’ ‘옹중석(翁仲石)’ ‘수호석(守護石)’ ‘수문장(守門將)’ ‘두룽머리’ ‘동자석(童子石)’ ‘우석목(偶石木)’ ‘벅수머리’ ‘돌영감’ ‘망주석’ ‘무성목’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돌하르방은 “1754년(영조 30) 목사 김몽규가 성문 밖에 옹중석을 세웠다(英祖 三十年 牧使 金夢煃 設翁仲石於城門外)”고 전해진다. 심재 김석익(心齋 金錫翼, 1885∼1956)이 1918년 저술한 『탐라기년(耽羅紀年)』의 이러한 최초 기록은 실제 제작시기와 160년 넘는 차이로 인해 일부 연구자들에게 의문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월곡 현덕문(月谷 玄德聞, 1817∼1869)이 1800년대 중반에 쓴『탐라기략(耽羅記略)』의 일부 내용이 김석익의 저서에서 논해지고 있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물론 아쉽게도 『탐라기략』이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들을 파악할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월곡 선생의 족보인 『연주현씨세보(延州玄氏世譜)』를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유추해낼 수 있다. 10살 때까지 함께 살았던 그의 증조부 현광보(玄光輔, 1739∼1826)는 돌하르방이 세워진 1754년 당시의 나이가 혈기왕성한 15세 청년이었다. 따라서 월곡의 저서에서 돌하르방에 관해 처음 언급했고 이를 심재 선생이 그의 저서에 인용했을 개연성(蓋然性)이 아주 높다 하겠다.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하르방의 크기는 각 읍성마다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제주읍성 돌하르방이 157∼238cm로 가장 크고 정의현성 돌하르방은 120∼177cm 내외, 대정현성 돌하르방은 108∼146cm 규모로 아주 작고 양식적인 변화도 제일 심하다. 지금은 대부분 돌하르방이 원래 세워졌던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지만 정의현성 돌하르방 12기는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채 복원된 남문과 서문, 동문터 앞을 지키고 있다. 돌하르방의 크기나 형태 등이 다양한 것은 김몽규 목사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제작했다기보다는 정의현성 및 대정현성의 목민관과 읍성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삼성혈 입구 돌하르방 전경. 1930년 제주읍성 남문에서 옮겨왔다.

돌하르방이 만들어진 동기는 무엇인가

돌하르방에 관한 학설은 먼저 거시적인 문화인류학 관점에서 보면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베사키사원 석상을 시원(始原)으로 삼는 ‘남방기원설’과 몽골 동남쪽 다리강가지역 석상인 훈촐로에서 유래했다는 ‘북방기원설’이 있다. 이에 반하여 토속적인 민속학 관점에서는 육지부 장승의 영향을 받았다는 ‘육지전래설’과 기단석에 정낭 홈이 파인 걸로 미루어 정주목의 신성함을 표현했다는 ‘제주자생설’이 그것이다. 하지만 제작시기와 조형특성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때 199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남방기원설’과 ‘북방기원설’은 점차 설득력을 잃고 있다. 독자적인 ‘제주자생설’ 또한 제주읍성의 일부 돌하르방 기단에 한해 정낭 홈이 파여 있고 정의현성과 대정현성 돌하르방 기단에는 아예 없는 걸로 미뤄보아 무속신앙과 결부된 성물(聖物)로서 기능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조형양식과 제작동기, 기능 등을 면밀하게 고찰해보면 돌하르방은 육지부 돌장승의 한 갈래임을 알 수 있다. 우선 형태적인 측면에서 상체인 얼굴부위를 크게 강조하고 하반신 표현은 과감히 생략하는 표현기법, 3∼4 등신의 짧은 몸과 얼굴비례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인체 비례는 얼굴 상호(相好)를 강조한 4등신 불상처럼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석상의 높이가 클 경우 보는 이의 시선이 밑에서 위로 향하게 되므로 어느 정도 위엄성을 갖추면서 친근한 인상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돌하르방과 돌장승 모두 읍성보호나 사찰보호를 위한 수문장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흉년 때의 구휼(救恤) 및 천연두 같은 전염병에 대비한 방역(防疫)의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백성을 생각하는 목민관의 마음이 담기다

특히 김몽규 목사가 돌하르방을 제작한 동기에 대한 해답은 그의 재임시절 업적에 잘 나타나 있다. 김석익의 『탐라관풍안(耽羅觀風案)』 기록을 보면 1752년 12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그는 1754년 10월까지 재직하면서 성곽방어집무실인 운주당(運籌堂)과 군사훈련시설인 관덕정(觀德亭)을 중수하고 제주향교 이설계획을 미리 세워둘 만큼 큰 선정을 베풀었다.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읍성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안전하게 지켜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업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대공사의 진행과정에서 고을백성인 민(民)의 소원하는 바를 관(官)이 스스로 알아차려 이를 적극 수용한 결과 오늘날 고유하고 독특한 돌하르방이라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예술적 경지를 창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제주 사람들은 대풍(大風)과 가뭄에 따른 기근(饑饉) 및 전염병인 여역(癘疫)에 크게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벽사진경(辟邪進慶)의 괴기스런 얼굴표정을 한 돌장승과 달리 돌하르방의 경우 약간 엄격한 얼굴표현과 함께 어깨와 팔, 손동작을 새롭게 표현한 것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세웠던 전라남도 ‘여수 석인(石人)’은 물론 강진 ‘병영성 홍교 벅수’ 등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는 김몽규 목사가 제주로 부임하기 이전에 해남현감, 평안북도 철산부사(鐵山府使), 자강도 만포첨사(滿浦僉使), 함경북도 무산부사(茂山府使), 평안북도 이산부사(理山府使), 통영의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경기도 남양부사(南陽府使) 등의 보직을 맡아 국경과 해안방어로 나라를 지켰던 무인출신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장승제와 같은 신앙적인 요소가 돌하르방에 배제된 것은 제작주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장승이 읍성주민과 사찰중심으로 세워진 데 반하여 목민관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돌하르방은 국가적인 유교이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돌하르방 전경

각각의 개성과 특징을 지닌 제주읍성 돌하르방

돌하르방의 대표적 조형기법으로는 전립형(戰笠形)의 벙거지 모자, 퉁방울눈과 주먹코, 일자형 귀, 꼭 다문 입술 이외에도 고유한 손동작과 어깨틀기, 시선처리 방향 등을 통하여 형태적 역동감과 절제된 해학미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석상의 배치는 돌장승처럼 한 쌍을 기본 삼아 한곳에 4기씩 서로 마주보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특히 정면이 아니라 우측이나 좌측어깨를 약간 틀어올리고 얼굴을 성문 밖으로 향한 시선처리는 매우 중요한 조형요소이다. 성문 밖 S자형 소로에 세워진 돌하르방 가운데 왼쪽 돌하르방은 왼쪽 어깨를 틀어 올린 채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서 밖을 주시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돌하르방은 그 반대로 오른쪽 어깨를 치켜 들고 얼굴을 약간 왼쪽으로 돌려 밖을 응시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제주읍성 돌하르방 가운데 동문 밖에 세워진 돌하르방 8기는 1927년 제주항 건설 매립재로 성곽이 허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중반까지 원위치에 가장 잘 보존된 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66년 10월 경복궁에 한국민속관(현 국립민속박물관)이 개관된 후 야외전시를 위해 1967년 가을 서울로 옮겨지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1914년과 1950년도 동문 밖 돌하르방 4기의 사진을 보면 읍성으로 들어가는 방향에서 오른쪽 앞의 돌하르방과 맞은편 뒤쪽 대각선상의 돌하르방은 서울로 보내졌고 나머지 2기는 제주대학교로 옮겨진 상태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마주보는 한 쌍을 가져가지 않은 이유는 석재에 흠결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곳의 4기 돌하르방 기단석 중 앞쪽 것은 형태, 뒤쪽 것은 형태의 정낭 홈이 나있다. 이처럼 성문과 가까운 쪽에 세운 2쌍의 돌하르방 기단석에 홈을 뚫어 2개의 야트막한 정낭을 걸쳐 놓은 까닭은 통행금지 목적보다는 성곽 보호를 위한 우마차 출입금지 의도가 더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이 기단석의 정낭 홈은 제주읍성 돌하르방 일부에만 나타나고 있으며 옛 사진들을 보면 정의현성과 대정현성 돌하르방에는 없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경향은 큼지막한 주먹코의 콧구멍 조각에서도 나타나는데 제주읍성 돌하르방에는 돌장승처럼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으나 다른 두 곳에는 전혀 새겨 있지 않다.
  • 제주읍성 동문 밖 돌하르방, 191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제주읍성 동문 밖 돌하르방, 1950, 홍정표 촬영, 제주대박물관 소장.
  • 제주시 방선문의 영주목사 김몽규 마애명, 1754년, 탁본, 제주동양문화 연구소 소장.
  • 목사 김몽규 존성대사비, 1759년,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 내

돌하르방의 문화재적 가치 제고(提高) 방안

제주읍성 돌하르방 가운데서 작품성은 물론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의 돌하르방은 안타깝게도 아직 지정문화재로 등록하지 못한 상태이다.
1971년 돌하르방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해인 1970년 8월 10일자로 「문화재보호법」(법률2233호)에서 관련조항을 신설했기에 가능했다. ‘지방문화재의 지정 등’을 규정한 제54조의2에 의거하여 돌하르방이 지정될 때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던 동문 밖 2기 돌하르방은 ‘관할구역 밖’에 있다는 이유로 제주도내 돌하르방들과 함께 지정될 수 없었다. 이 법조문은 현행 문화재보호법에서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어 적어도 형식상 제주특별자치도 차원의 지방문화재 추가지정방안은 없는 실정이다. 제주 돌하르방은 육지 돌장승과 견주어 작품성이 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뛰어난 예술적 경지를 이루고 있기에 국가민속문화재 지정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돌장승 가운데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통영시 문화동 벅수(1968), 나주 불회사 및 운흥사 돌장승(1968), 남원 실상사 돌장승(1969), 부안 서문안 당산 및 동문안 당산 돌장승(1970), 여수 연등동 벅수(1990) 등 지금껏 모두 10개소 18기에 이른다.
한편 1980년대 이후 본격적인 관광개발과 급격한 도시화에 편승해 새로 만든 돌하르방이 획일적으로 도내 곳곳에 설치되고 있어서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것은 마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고 하는 그레셤(Thomas Gresham, 1519∼1579)의 법칙처럼 날이 갈수록 돌하르방의 원형적 모습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이들이 완전히 차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광업체나 관공서, 학교, 공공기관 등의 다중이용시설에 무분별하게 설치돼 있는 돌하르방들에 대한 전수조사가 매우 시급히 이뤄져야만 한다. 물론 이와 병행해 문화재지정 돌하르방들에 대한 체계적인 보존관리방안 또한 마련돼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실질적이고 장기적인 돌하르방의 보존관리계획과 함께 돌하르방 제작자 교육, 돌하르방 홈페이지 구축, 3D 촬영 및 입체영상 제작, 문헌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 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