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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꿈

VOL.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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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라산 유산기록에 나타난
백록담 인식

한라산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 신성시 되어 왔으며, 정상의 백록담도 태고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옛 지리지 등에 나타난 한라산과 백록담에 대한 지리적 설명에도 그러한 면이 잘 부각된다. 이러한 한라산을 동경해 조선시대 제주도를
방문했던 시인 묵객들과 관리들이 한라산을 올랐으며, 그 감흥을 ‘유산기(遊山記)’로 기록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글. 고윤정(제주특별자치도 산림휴양과, 『한라산의 마애명』 저자)

한라산 등람의 최종 목적지, 백록담

유산기록을 남긴 등람자들의 기록에는 한라산 등람의 최종 목적지인 백록담에 대한 경관의 모습과 정상을 오른 감회를 구구절절이 적고 있다. 수려한 한라산의 풍경과 신비로운 백록담의 장관에 그곳을 오른 이의 넘치는 감흥을 주체할 수 없음이 글의 곳곳에 피력되어 있다. 한라산의 정상부에 해당하는 해발 1,950m에 위치한 백록담에 대한 인식은 여러 문헌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중 임제의 「남명소승(南溟小乘)」에는 “한라산 정상부의 봉우리 형세가 절벽과 같아서 용출한 것처럼 보이며, 구덩이 같이 함몰되어 못이 되었으며 둘레는 7, 8리 가량 된다. 물은 유리와 같고 깊이는 측정할 수 없으며 못 가에는 하얀모래와 풀들이 있다. 그 높고 큰 형상과 돌이 쌓인 모양이 무등산과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백록담은 그야말로 신비감의 대상으로 인식되어 오늘날까지도 백록담을 보기 위해 한라산을 오른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러한 백록담은 조선시대 한라산을 등람했던 인물들이 쓴 시의 핵심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라산이 절해고도에 위치한 섬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점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한라산을 동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한라산 정상부에 백록담이 있어 더욱 신비스러운 산이요 나아가 신선이 사는 산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또한 흰 사슴을 탄 백록담 노인 이야기나 신선이 먹는 불로초가 있을 것이라는 인식과 장수를 상징하는 노인성을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산이라는 인식은 한라산과 백록담을 더욱 신성시하게 만들었다.
백록담

신비로운 백록담을 만난 선비들의 감탄

고도가 높아 은하수(雲漢)를 끌어당길 만하다는 의미의 한라산은 정상부가 평평하여 두무악 그리고 꼭대기가 둥글어서 원산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며, 정상부에 못이 있어서 사람이 떠들면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다고 표현되기도 했다. 이러한 한라산은 인간들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지게끔 하는 것이다. 조관빈, 김치, 김희정, 최익현, 이해조의 기록은 한라산 백록담에 대한 선유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라산을 오른 유산자들은 백록담의 외형상 모습 뿐만 아니라 신선과 백록을 신비로움의 대상으로 표현했다. 이에 따르면 백록담은 하얀 사슴들이 물을 먹는 곳이요 맑고 깨끗하여 티끌기가 전혀 없어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아울러 백록담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각(산봉우리)들이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백록담은 참으로 천부의 성곽이었다.
층층이 울창해 사방을 에워쌌고 가운데에 맑은 담못이 있어서 깊이 몇 길이나 된다고 하니 여기가 백록담이다. 속세에 전하는 말이 신선이 백록을 타고서 이못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아까 백록이 있어서 백록담가를 따라서 지나갔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로다. 그때부터 일기가 아주 맑았다. 바다는 확 트여서 하늘과 바다가 서로 포용하는 듯해서 너무 넓어서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다.
- 조관빈,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 “層巒四圍 中有潭綠淨深可數丈 卽白鹿潭也 俗傳神仙騎白鹿 遊於此潭云 俄而有白鹿 從潭邊過 誠一奇事也 于時天氣澄淸 海色莽濶 上下相涵 浩無涯畔”
(백록담이) 맑고 깨끗하여 티끌기가 전혀 없으니 은연히 신선들이 사는 듯 하였다. 사방으로 둘러싼 山角들도 높고 낮음이 다 가지런하니 참으로 天府의 성곽이다.
- 최익현,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 “淸明潔淨 不涉一毫塵埃氣 隱苦有仙人種子 四圍山角 高低等均 直天府城郭.”
윤제홍은 직접 그린 「한라산도(漢拏山圖)」에서 백록담 분화구 내에 백록을 탄 신선을 그려놓았는가 하면 백록담의 유래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백록담설화(白鹿潭說話)」에서도 백록을 탄 신선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해가 저물게 되어서 바위틈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달빛 아래에서 한 신선이 백록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서 물을 마시는데 뒤에는 가을연꽃이 있어 그가 곧 여동빈[呂仙]임을 알았고 이 때문에 백록담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 윤제홍, 「한라산도(漢拏山圖)」 : “舊有人 値日沒 宿巖間 月下有一仙翁 騎白鹿來 飮于此肪 後有秋蓮 知其爲呂仙 由是名白鹿潭“

백록담에서 가장 높은 혈망봉

혈망봉은 한라산 백록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해당한다. 한라산의 최고봉이라는 주장도 있다. 백두산의 장군봉, 설악산의 대청봉, 지리산의 천왕봉처럼 한라산의 최고봉은 바로 혈망봉이 된다는 것이다. 혈망봉이라는 명칭은 김치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에 처음 등장한다. 이원조의 「탐라지(耽羅誌)」 형승조에는 혈망봉은 백록담 남쪽 변두리에 있으며 봉우리에는 하나의 구멍이 있어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고 하여 혈망봉이 분화구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라산 최고지점 일대를 뜻하는 봉우리임을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에도 한라산 정상부에 백록담과 함께 혈망봉이 표시되어 있다. 혈망봉에 대해서는 한라산 유산기에서도 백록담에서의 자연경관적 요소로 나타나는데 김치와 조관빈의 기록에서 그 형상과 이름을 지은 유래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한낮에 비로소 산꼭대기 위에 도착하여, 혈망봉을 마주하여 앉았다. 봉우리에 하나의 구멍이 있어 가히 통하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 김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 “日午始到絶頂之上坐對穴望峯 峯有一竅 可以通望故名焉.”
이윽고 정상에 도착하니 하인들이 앞 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하길 ‘이것이 바로 혈망봉입니다.’ 구멍이나 있어서 그걸 통해서 멀리 바라볼 수 있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한다.
- 조관빈,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 “及到絶頂 從者指前峰曰 此是穴望峰 峰有竅可通望 故名焉.”
제주시에서 바라본 한라산

한라산의 식생 기록까지 담은 유산기

한라산은 약 2,0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식생의 보고’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백록담 일대의 식생은 구상나무, 털진달래, 산철쭉, 시로미 등 고산생태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한라산을 등람했던 제주목사와 대정현감 그리고 유학자들이 남긴 유산기와 다양한 시문 속에도 한라산의 다양한 식생에 대한 정보들이 들어있다. 한라산 유산기에 나타난 식생에 대한 관찰기록은 대부분 산을 오르내리면서 보았던 나무와 풀에 대한 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주목된다. 임제는 한라산 남쪽 산기슭에서 출발하여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본 나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언급된 “잣나무, 삼나무, 전나무와 비슷하며 깃대와 양산 덮개모양으로 우뚝우뚝 늘어서 있는 나무”는 스님이 말한 계수나무가 아니라 구상나무로 추측해 볼 수 있으며, 측백종류의 향기나는 등줄기는 눈향나무로 여겨진다. 이원조는 동청, 금령, 화등가, 여점실 등은 육지에서도 희귀한 품목이라고 하고 있으며 참대와 영주실, 향목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했다. 여기서 참대는 제주조릿대를 의미한다. 영실기암 절벽의 식생에 대해서도 관찰력이 뛰어나고 섬세하다.
온 땅에 참대가 가득 차 있었다. 빽빽하기가 방석과 같았고, 어린 것들은 잔디마냥 앉아서 깔개로 삼을 수 있었다. 어떤 향내 나는 이파리는 작지만 줄기를 뻗어서 땅을 덮으며 바위를 얽어매고 있었는데, 열매가 검고 달았다.… (영실기암)깎아지른 절벽에는 향나무들로 덮여 있었다. 굵은 아름드리 밑둥 줄기들이 한쪽으로 쏠리어 굽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철쭉들이 많았다. 키가 1척이 안 되어 보였다. 가지가 많아 땅을 덮고 있으므로 마치 방전과 같았다.
- 이원조,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 “滿地苦竹密 如席嗽如莎可坐而藉 有香葉小而蔓布地絡石 實黑甜名瀛州實 煎葉爲茶味甚洌 … 崖壁被香木 骯髒偃屈 上枯下靑 冬春爲雪所壓 生氣不敷 其間多躑躅 長不尺許 而多枝布地如方氈 三四月花如開 遍山如錦紋碁子 䝮擷綺麗 足以媚人眼.”
한라산 선작지왓

한라산 꼭대기에서 본 노인성에 대한 기록

제주도는 노인성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장수하는 이가 많다고 전해져 내려왔다. 노인성을 노성 또는 수성이라고 하며 서귀진에서도 볼 수가 있다고 했다. 이원조 목사는 1841년 가을에 자신이 직접 관측한 것을 토대로 ‘남남동쪽에서 떠서 남남서쪽으로 지는데 고도가 지면에서 21° 정도의 높이에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한 심연원과 이지함이 노인성을 보았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세종 때는 역관 윤사웅을 파견하여 한라산에서 관측하게 했으나 구름 때문에 보지 못했다고 한다. 노인성은 봄과 가을에 한라산 백록담에서 볼 수 있었던 별이요 장수의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수명장수를 관장하는 노인성에 대해 삼국시대 이래 고려, 조선시대 중종조(1506∼1544)까지 도교적 성격의 노인성제가 행해졌다. 이것은 별에 대한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조선 태종대까지만 해도 매해 봄과 가을에 두 차례 제사를 지냈다. 희생은 살아있는 소 한 마리를 올렸으나 제사 후 소격전에서 기르도록 했다. 노인성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던 임제는 장수하고 싶은 마음에서 노인성을 보고자 했을 것이다. 임제의 기록 이외에도 노인성은 김상헌, 윤제홍의 기록에도 등장하고 있다. 충암 김정의 「제주풍토록」에도 노인성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나타난 한라산과 혈망봉
한라산 꼭대기에 오르니 사방이 모두 푸르고 아득하다. 南極老人星이 내려다보인다. 老人星은 상서로운 별이다. 다만 한라산과 중국 중원의 남악에 올라가야만 이 별을 볼 수 있다.
- 김정,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 “登漢拏絶頂 四顧滄溟 俯觀南極老人 (老人星 大如明星 在天南極之軸 不出地上 若現則仁壽之祥 唯登漢拏及中原南嶽則可見此星) 指點月出无等諸山.”

한라산의 옛 모습에 대한 소중한 기록

16~19세기에 작성된 한라산 유산기록들에는 공통적으로 한라산 동서남북 등산로와 등람여정 그리고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서 보이는 수려한 자연경관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함께 주변에 존재하는 역사문화 자원에 대한 느낌을 기록하고 있어 조선후기 한라산의 자연환경과 제주도의 사회상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한라산 유산기에는 당시 한라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정보와 경관적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한라산의 자연경관 및 문화경관에 대한 인식 두 가지로 요약되어 나타난다. 자연경관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백록담과 혈망봉, 그리고 한라산의 다양한 식생, 지질 및 기후특성에 대한 인식을 살펴 볼 수 있다. 문화경관 요소로는 제주 삼읍의 배치모습, 노인성과 방암, 불교유적인 존자암과 수행굴, 한라산신제와 기우제, 칠성대의 존재가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에서 보듯이 조선시대에도 제주도민들이 한라산을 다양하게 이용했음을 보여준다.